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여 (시 91:1-3)

2023. 9. 5. 10:45카테고리 없음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1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문득 올랐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영화여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2002년도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제목은 영웅, 천하의 시작 (2002) 입니다. 배우 이연걸이 주연이어서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명장면으로 뽑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백만 명이나 군사들이 성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장면입니다. 새까맣게 하늘을 메운 날아가는 화살이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화살들은 자체 만으로도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영화 다른 명장면은 그렇게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용기를 것일까, 무모함의 극치일까 고민하게 만들었던 부분입니다. 사실 이게 애매합니다. 무엇이 용기인지 무모함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삶에서 용기를 내서 무언가 해야 때도 있지만, 용기를 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용기를 내야 하는 이유와 용기를 있는 이유도 다양한 같습니다. 마치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시인은 용기를 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접하고 있는 세상은 상당히 두렵고, 정말 공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위험한 것들이 사방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위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한 것이 91 5-6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밤에 찾아오는 공포, 낮에 날아드는 화살, 어두울 퍼지는 전염볌, 밝을 닥쳐오는 재앙

 

이런 말만 들어도 무시 무시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지난 동안 겪었던 일들이고, 우리 삶에서 경험할 있는 것들 수도 있습니다. 묵상하다가 영화 장면이 올랐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시 무시 하다. 공포스럽다. 정말 끔찍하다 말들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 이런’라는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백은 더욱 담대합니다.

 

명이 왼쪽에서 명이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정도면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오기일까요? 용기일까요? 무모함일까요? 확신일까요? 배짱일까요? 자기기만일까요??

 

그런데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이 안에 가득해 졌습니다.이게 자신감이구나. 믿음이구나. 용기를 내는 것이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확신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 에서 찾아볼 있습니다. 인생은 공포스럽지만 그것에 눌리지 않겠다는 확신, 믿음이 그에게 있음을 느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시인에게 있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임을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라고 말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온맘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이자 감사의 고백이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시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만난 것이구나하는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무섭고, 정말 두려운 순간들이지만, “하나님의 그늘 아래,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살아본 사람만이 있는 고백이라는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1절을 다른 눈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깨달음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살아온 사람만이 있는 고백 5-7절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듣기 좋으라고, 또는 오기나 무모함으로 하는 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그의 삶에서 울어나오는 사골국물 같은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전쟁 중입니다. 무슨의미이냐 하면, 아무 것도 장담할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있는 시인의 용기가 돋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원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를 따랐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피난처입니다.  나의 요새가 되시고,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고, 고백했으면 합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고백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그늘 아래,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살게 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고백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것입니다.

 

언제냐 하면, 바로 전쟁 중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전쟁터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이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살아야 하는 곳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는 정말 무서운 것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위험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말 공포스러운 것들과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총과 칼의 위험도 있지만, 우리 영혼을 파괴하는 것들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는 비결은 분명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피난처가 되시며,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아닌가요? 하나님을 피난처와 거처로 삼은 사람들이 있는 고백이 9절에서 12절까지 나옵니다.

 

 ‘… 화가네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이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천사의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고, 사자와 독사를 밟아도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나 다치지 않게 된다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보이는 고백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에 나오는 자신감이자 믿음일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 바로 용기가 아닌가 합니다. 아니, 제가 잊어 버렸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시는데, 하나님이 거처가 되시는데, 하나님이 요새가 되시는데,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동일하게, 여러분에게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요새가 되시고,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사시는데, 여러분은 무엇이 두려우신가요?’

 

2.

그리고 알게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은 어쩌면 전능자의 그늘 아래서 우리가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든든합니다. 그렇지요? 살면서 돈이 모이면 자신감이 생긴다고 합니다. 어떤 분의 고백은, 통장 잔고가 많아지자 두려울 없어지더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돈의 그늘 아래 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주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할 있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돈은 우리를 배반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돈의 그늘 아래 살지 않기를 기도해야 것입니다. 대신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살게 달라고 기도해야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찾아오는 어떤 두려움에서도 우리가 본문의 시인처럼 담대함으로, 자신감 있게 있을 것입니다. ‘.. 내가. 그냥 하는 소리, 오기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전능자의 그늘 아래서 살고 있기에 있는 고백임을 우리가 다시 한 번 기억해 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시인과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말해야 합니다.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까요? 그것이 이것입니다.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이렇게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직 이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어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시인처럼 고백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 우리가 고백처럼 것입니다. 정말 위험하고 정말 무서운 현실이지만, 우리의 시작은 시처럼 했으면 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백처럼 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것입니다.

 

주님, 나의 피난처가 되어주세요. 주님, 나의 요새가 되어 주세요. 내가 주님의 그늘 아래 살기를 원하나이다이렇게 고백하고, 이렇게 기도하면, 기도를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런 확신이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고백한 모든 일들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시인이 시편 91편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하고, 선포할 있는 근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지존자를 나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구절이, 우리가 두려운 현실 속에서 용기를 진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구절이 우리가 용기의 가장 합리적인 이유가 되어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흔들릴 없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늘 아래를 거처로 삼은 이들이 가진 용기가 진정이라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 하면 오르는 인물이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은 싸움의 대가였습니다. 신체 조건도 뛰어났고, 엄청난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였고, 신체 조건도 골리앗과 싸울 있을 정도로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전쟁 경험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과 싸우고자 했습니다. 다윗이 이런 결정을 하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는 자기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경험이 다윗의 자산이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가진 자산은 바로 용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처한 현실은 낮에 날아오는 화살처럼 치명적이고 공포스러웠지만,

윗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이시고, 또한 지존자를 거처로 삼았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에게는 용기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어떤가요? 우리가매일매일 마주 대하는현실은 어떤가요? 정말 두렵고 무서운 하루 하루가 아닌가요? 도저히 넘을 없는 같이 보이시나요? 그래서 살아갈 용기는 꺽이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억누르고 있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도 시인처럼 목소리 높여 고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이것인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며 사랑이며 경배이며, 또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든든함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피난처이시다. 시골 마을마다 있는 느티나무를 때마다 품이 넒구나하고 감탄한다. 느티나무는 자기 곁에 다가오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동네 사람이든 낯선 사람이든 누구나 받아들여 품어준다. 품이 넉넉하다. 느티나무가 그런데, 하나님은 하시지 않겠는가? 예수님을 통해 우리게 드러나신 하나님은 세상에 살면서 상처 입은 사람들, 지친 사람들, 비틀거리는 사람들, 죄인까지도 받아주신다. 도덕적인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 당신께 나오는 사람은 그냥 품어 주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피난처이시다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깨닫게 되면, 다시 기억해 낸다면, 우리에게 용기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용기입니다. 무서운 현실 속에서도 나에게 주어진 일을 있는 용기입니다.  두려운 현실과 싸울 용기입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으로 생기는 용기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또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