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찬양하는 욥 (욥기 1:20-22)

2023. 11. 7. 10:13카테고리 없음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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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욥기 1 21, 구절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신앙 공동체에서 흔히 듣는 그런 고백 같습니다. 그렇지만 고백의 배경을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아무 없을 , 평안할 , 즐거울 , 욥이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욥은 너무나도 슬픔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명의 자녀와 그의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가 20절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견딜 없는 슬픔을 경험하고 있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슴이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버리는 경험을 하고 있는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슬픔 속에 있는 그가 한, 다음 행동과 고백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했던 고백이 21절이기 때문입니다.

 

모태에서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진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사람이 간사한 면이 있는 같습니다. 제가 자신을 들여다 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뭔가를 주시면 기쁘고 평화롭고, 마냥 행복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제가 주신 것을 다시 가져가시면 그렇게 서운하고 안타깝게 느껴지고 왠지 빼앗긴 느낌이 듭니다. 욥의 고백처럼, 원래 하나님 것인데도, 그렇게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다시 가져 가신 같으면 서운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욥의 반응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명의 자녀를 잃어도 슬픔에 빠질텐데, 열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잃어버린 후에 찾아온 슬픔은 감당할 없는 슬픔인 것입니다.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욥은 순간에도 평소에 하던 것처럼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이런 욥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런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해야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하늘을 원망하면서 그런 일을 당한 자신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욥의 고백은 어색하기 그지 없습니다. 슬픔 속에 드리는 예배이고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는 욥의 심정을 헤아릴 없습니다. 그리고 욥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 상상도 못하는 이유는 그가 평소에 하나님을 대했던 모습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에는 그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가족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특히 욥은 정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열심히 예배하고 열심히 봉사했는데, 그렇게 조심하면서 살았는데, 그런 그에게 하루 아침에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나쁜 짓을 하다가 일어난 일이면 이해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 성실하게 살던 그에게 일어난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슬픔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현장 속에서, 자신을 해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는 욥의 모습이 기가 막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질문 하나, 나는 욥처럼 있을까?

 

사실,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하지만, 내가 나서,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기 보다는, 나에게로 돌리기 쉬운 인간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욥은 특별했습니다. 슬픔이 밀려오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슬픔과 애통 속에서 드리는 찬양하는 욥의 모습이 너무나도 짠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으로 다시 제가 되돌아 왔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하나님께 받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께 받을까봐 두려워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를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원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뭔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 되시기 때문이고, 우리를 사랑하사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 예배이고 찬양인 것입니다. 그것을 욥의 찬양이 말해 주는 것입니다. 즐겁고 기쁠 때도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슬프고 애통스러울 때도 욥처럼 하나님께 엎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그런데, 욥이 드린 찬양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욥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엄청납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 1:1, 2:3)’ ‘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 1:3)’

 

그래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기에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일이, 오늘 본문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사람에게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 아닌 믿음이 사람들에게 있는 같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에게 일어난 불행을 보면서 특히 철학자들은 이렇게 묻곤 합니다.

 

  전능하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는가?’

 

욥기는 부분에 대해 보여주는 하면서도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분에 대해 답을 하려고 시도하는 신앙 서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읽게 책이 있는데요. 권지성 이라는 분의 특강 욥기 이런 철학자들의 반응을 가지로 정리해 놓은 부분은 읽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첫째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 아니거나 악을 제거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읽어보면, 첫번째 설명은 하나님보다 악이 강력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번째 설명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악의 존재는 인정하는 합니다. 신을 부정해 버리면 사실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구별하는 기준이 없어져 버리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질문에 대한 가지 대답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 같습니다. 무엇보다, "왜 전능하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는가?'하는 질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철학자들의 질문보다 어려운 것이, 소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반응이고 해석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욥처럼 열심히 살고, 신앙 생활도 잘하고, 하나님을 위한 헌신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만 내려 주셔야 한다는 믿음이 있는 같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없는 고통이 찾아오면, 어떤 이는 일들이 죄와 악에 대한 철저한 징벌이라고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이 당한 고난과 슬픔을 죄의 댓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욥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지금도 팽배합니다. 그래서 자연재해를 당하거나, 전쟁 중에 무고하게 죽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적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게 사실일 있지만, 욥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런 믿음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를 단순히 죄와 악의 징벌로 보는 것은 위험한 해석일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어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했을 , 우리 각자가 죄를 깨닫게 되는 일은 있을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없는 고통이, 어려움이 삶에 대한 어떤 가르침을 위해 허용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물론 고난을 통해 배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만난 폭풍이 그것입니다. 제자들은 폭풍을 잠재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중에 그들 가운데 일어나게 고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배웠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욥이 당한 고난은 사람이 이해할 없는 영역에 속합니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의 문제를 억지로 해석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욥기가 보여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이 해석하지 않는 고통의 문제를 우리가 억지로 풀어보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켜볼 필요가 있는 것을 아닐까 합니다.

 

슬픔을 당한 이들을 판단하지 말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하는 이들과 함께 있어 주고, 슬픔 속에서 함께 예배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반응이 있지만, 욥이 받은 삶의 고통의 문제는 여전히 신비와 모호함 가운데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나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박해 당하던 시절이 배경입니다. 바닷가에 사는 그리스도인 농부들이 순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순사들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밟고 거기에 침을 뱉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을 풀러날 있지만 거부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마지못해 성화는 밟았습니다. 하지만, 차마 성화에 침을 밷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택합니다. 순사들은 그들을 바다 속에 박아 높은 통나무에 묶어 놓습니다. 농부들을 차가운 바닷물에 잠겨 서서히 죽게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가지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죽어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는가?

순교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은 살기보다 죽기를 선택했을까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 농부들에게서 욥의 모습도 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을 누리며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욥에게 닥친 고통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하시다고 원망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침을 뱉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바닷물에 잠겨 죽는 그리스도인 농부 같습니다.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슬펐지만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예배한 이유는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함도 아니고, 성공하기 위함도 아니고, 자녀의 복을 누리기 위함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이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은 나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서도 아닙니다그러니까, 욥은 아무 이유없이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예배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되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까닯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욥도 하나님을 까닭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순교의 의미는 하나님을 까닭없이 사랑한 사람들의 고백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유를 알고 싶어합니다그러고 어떤 이유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사랑하고, 나에게 못되게 굴면 미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도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잘해 주시면 찬양하고,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같으면 싫어하고 서운해 하기도, 두려움 가운데 빠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누군가를 이유없이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린 합니다. 이유를 없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했던 욥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물으시는 아닐까요?

 

너도 아무 이유없이 나를 사랑할 있겠니?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까닭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까닭없이 사랑할 있을까요? 우리를 땅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이기에,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찬양하고 사랑할 있는 우리가 있을까요?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옳다고 믿어 버리는 욥의 모습을 하나님이 그리워하실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를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것도 같습니다.

 

그는 동방 사람 가장 훌륭한 자라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