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으라 (마 25:1-13)

2023. 5. 3. 11:37마태복음

1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금요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만, 예수님은 주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교회 절기 중 가장 중요한 날들입니다. 한 주간 동안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묵상하면서 신중하고 경건하게 보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도 다시 한번 새롭게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비유 중에서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열 처녀 비유는 천국에 대해 설명하면서, 특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도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해 보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에는 미련한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둘의 차이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고 준비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그런 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차이는 또한 깨어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그 날짜와 시간은 알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분명한 도전은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 공동체에 절실하게 필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이 닫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슬기로운 자가 되기를, 깨어 있는 자가 되기를, 그래서, 주님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물론 주님이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잠을 자야 하므로 항상 깨어 있기가 어렵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열 처녀들도 신랑이 늦게 도착하자 다 졸고 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은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일까요? 그리고 나중에는 우리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되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깨어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첫째,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자는 것입닏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항상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처럼, 한 사람의 죽음도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항상 대기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실 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자세는 그날을 기다리며, 그날을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5)’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도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심판주가 문 앞에 계시니라 (약 5:8,9)’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의 이 고백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금방이라도 오실 것처럼 영적인 긴장을 늦추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어쩌면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나요?
아니 수 많은 날들이 남았다고 믿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천년만년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갑자기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요한 계시록에서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딜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이 반드시 오신다는 기대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니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을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2-44)’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이 오시니까 산에 올라가서 준비하고 있어야 할까요?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충성되고 지혜롭게 살 것을 비유로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5-49에 보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은 주인이 없든 있든 상관없이 성실함으로 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악한 종은 이렇게 했습니다. ‘..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고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종말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성실하게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깨어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함께 하셨는데, 그들 중에서 특별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잉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 26:38)’

예수님이 베드로와 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함께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얼굴에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할 때 제자들은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셨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깨어서 기도하지 못했던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 26:40,410)’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한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너나 할 것도 없이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시험에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라면, 우리도 주님 말씀을 따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이 약해서 기도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핑계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깨어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가 기도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주님이 깨어 있으라고 우리에게도 명하십니다. 그래서 고난 주간 동안, 우리가 더욱 깨어서 기도했으면 합니다. 기도할 내용이 많습니다.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선교사님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 저녁에 모여서 기도했으면 합니다. 또한 토요일 아침에도 우리가 한 시간 기도했으면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우리 공동체가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이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이 어제보다 좀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3.  
또한 주님이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슬기로운 자들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언제 오실지 몰랐기 때문에 준비한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준비한 등과 기름은 신랑에 반드시 온다는 기대와 믿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믿었던 것처럼, 진짜로 믿게 되면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슬기롭다고 말씀하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미련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도 없고, 믿음도 없이 그냥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반드시 오신다는 믿음이 있을까요?

바라기는 여러분과 제게 있는 믿음은, 성경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반드시 오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듯이,
부활하신 후에 오백여 형제들에게 보이시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는 말씀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슬기로운 자들이 준비한 등불의 기름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미련한 자들로 불렸던 처녀들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들이 가진 믿음과 다른 차이가 뭐냐 하면, 바로 깊음의 차이입니다.

믿음이라고 다 같은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에는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나무뿌리에 비유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요즘 가끔이지만 토네이도가 불고 있습니다. 바람의 위력이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두렵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바람의 위력으로, 엄청난 크기의 나무도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엄청난 크기의 나무의 뿌리가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나무 주변에 물이 너무 풍성해서 그렇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아도 충분한 물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나무는 큰데 바람만 좀 세게 불어도 뿌리째 뽑히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깊은 믿음의 뿌리를 내린 사람이 슬기로운 자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도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고난과 역경이 도리어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가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암 수술 전날 밤, 존 파이퍼 목사는 암에 걸린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라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암을 낭비하지 마세요’

사실은 암은 낭비해야 합니다. 버려야 하고 짤라 내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암이 주는 유익도 있음을 존 파이퍼 목사가 깨달은 것입니다. 암이라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 뿌리가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암으로 고생만 하고, 믿음도 없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한 암을 낭비한 것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어질 기회를 날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위틈에서 자란 나무는 토네이도가 불어도 뿌리가 뽑히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우리 믿음 뿌리도 깊이 있게 내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들이 슬기로운 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준비하는 일은 슬기로운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슬기로운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렇지만 슬기롭다고 해서 너그러울 필요는 없습니다.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그러자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합니다.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하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어떤 일은 너그럽게 대하다가 둘 다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 부분도 주님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로 지혜 있는 자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삶에서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일을 우리가 낭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울리 믿음 뿌리가 깊어지고 강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슬기로운 자들처럼, 주님의 재림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지금 오실 것처럼 믿으며 깨어 있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도와 달라고 기도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우리는 준비되었습니까?
미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었습니까?

신중한 계획은 믿음으로 사는 삶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깨어서 기도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 위로는 주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즐거움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옵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자에게 기회가 옵니다. 깨어 있는 자에게 기회가 옵니다. 어떤 기회인가요?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주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겠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야겠습니다.

금방 오실 것처럼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