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마 21:12-13)

2023. 5. 3. 12:25마태복음

1
지난주에 이어, 예수님의 포도원 주인 비유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포도원 주인 비유를 말씀하시고 내리신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 20:16)’

그런데 이 비유의 결론을 가지고, 예수님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면, 여전히 알쏭달쏭한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비유에서 나오는 품꾼들은 먼저 와서 12시간 일했든, 나중에 1시간 일했든 상관없이 같은 품삯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비유의 결론은 품꾼들이 임금을 받을 때 순서만 일치하지, 비유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 비유라고 들려주신 이야기인데, 여전히 깨닫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포도원 주인 비유가 누구를 위한 비유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를 의미하는 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품꾼은 누구일까요?

바리새인일까요? 유대인일까요? 아니면 이방인들일까요? 아니면 제자들일까요?

이른 아침 일자리를 구하려고 인력 시장에 나온 품꾼들은 가난한 사람들이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포도원 주인의 선택을 받고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포도원 비유에서 자기 이야기로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품꾼들처럼, 제자들도 가난했습니다.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의 이른 아침에 주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주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생의 이른 아침이든, 인생의 마지막이든, 주님의 긍휼 하심 때문에, 선택받았다는 것입니다.

품꾼이 포도원 주인을 위해 일했듯이, 제자들도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품꾼이 뜨거운 태양 속에서, 사막의 먼지를 마시면서 포도를 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른 아침 주인에게 선택을 받은 자가 누리는 기쁨도 있지만,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생하는 사람들이 제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준비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주님의 부름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름에는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그런 길이라도 기쁘게 갈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을, 주님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이른 아침은, 오늘 하루가 어떻게 될 지 몰라 불안한 아침입니다. 그 아침에 포도원 주인이 우리를 부릅니다. 또한 늦은 오후는, 오늘 하루가 공허하게 끝나 버릴 것 같은 처참한 오후인 것입니다. 한 끼 식사를 걱정해야 하고,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 늦은 오후에, 포도원 주인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품삯을 받을 수 있다면, 언제가 되었든, 우리가 주님의 부름에 기쁘게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간절함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 간절함은 주님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게 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째서 지금까지 놀고만 있느냐”

물론 이 말은 어떻게 들으면 상처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사람에게 이 말은 보약입니다. 놀고 싶어서 노는 게 아니지만, 주님이 불러 주시면, 주님이 원하시면, 우리에게 일할 기회가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불러 주신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해도,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어도, 오늘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 제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에 불려진 것이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잘나서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에 다행히 먼저 눈에 띄어서, 부름을 받은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늦게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기죽을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아직 부족해서, 주님의 부름을 받지 못한 것일 수 있지만, 여전히 주님이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늦었지만,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남은 시간 동안 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의 모습입니다. 포도원 비유를 통해 보여주신 천국의 모습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2.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영특하기도 합니다. 이런 주인을 만나면, 우리는 부지런한 자가 되기 보다, 게으른 자가 되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 고난 받는 것,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영광만을 받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평생 나하고 싶은 데로 살다고, 다시 말해서 하루 종일 놀고 있다가, 마지막에 주님이 불러 주시면, 포도원에서 아주 조금만 일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포도원 주인이 얼마나 일했든지 상관없이 같은 보상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어쩌면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자신을 반드시 불러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수난에 대해 두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러 보냈습니다. 대신 주님이 주신 보상에는 눈이 커져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왕이 되시면, 그 보좌 옆에서 12지파를 다스릴 수 있다는 꿈만 꾸고 있었습니다.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영광만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자,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한 명도 예외 없이 도망갔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워서 도망갔지만, 그래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자가 되었습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된 것입니다.

먼저 부름을 받았느냐, 나중에 부름을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느냐, 깨달았느냐, 믿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은혜를 깊이 있게 깨닫는 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포도원 주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도전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자’는 것입니다. 단지 돈 몇 푼 때문에 그 일을 하지 말고, 부름을 받았을 때의 초심을 가지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일해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우리가 비유에 나오는 품꾼들처럼 일할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우리 모두가, 이른 아침 주님의 부름을 받은 품군처럼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질문에 우리 모두가, 늦은 오후에, 주님의 부름은 받은 품군처럼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를 불러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나이다!

주여,우리로 살게 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집주인은 우리의 능력을 보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간절함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늦은 오후에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았다고 거만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3.
이번 주에 묵상하신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기억나시지요?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문제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누가 더 많은 일을 했느냐? 누가 더 중요한 일을 했느냐? 누가 능력이 많느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있었던 큰 관심은, ‘누가 더 큰 상을 받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일한 만큼 보상을 받겠다는 세상 논리로 무장한 제자들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했으니 내가 더 크다. 삼 시부터 일했으니 내가 더 크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경 많이 읽고,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했기 때문에, 우리의 기대는 하늘 높은 줄 모릅니다. 더 큰 보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우리가 상을 받았다고 할지 모릅니다. ‘멋진 성도’라는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같은 보상을 주십니다. 받을 만해서 받는 보상이 아니라, 그럴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보상인 것입니다. 그 상을 받고 우리는 너나 할 것이 기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품꾼들처럼 원망할까요?

예수님의 포도원 주인 비유를 묵상하다가, 생각났던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축구입니다. 저는 축구 경기를 즐겨보는 편입니다. 운동장에서 뛰지는 못하지만, 힘차게 뛰는 선수들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하필 축구 경기가 생각났을까요? 축구 경기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포도원 주인 비유와 축구 경기가 비슷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수는 90분 내내 뜁니다. 반면 어떤 선수는 전반전만 뛰기도 하고, 어떤 선수는 후반전에 1분 정도 남겨 놓고 뛰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90분 중에 1 분을 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해설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 듯 합니다. 1분 안에서도 승패가 갈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축구 전술 상, 선수를 교체해서 몇 분이라도 뛰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 분이라도 경기장에 들어가려면, 준비 운동을 해야 합니다. 경기장에서 뛰는 일 분은 대충 때우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모든 선수들과 응원했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기뻐합니다. 승리의 기쁨이 모든 선수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보상은, 함께 운동장을 뛰어다녔던, 그러니까, 함께 고난에 동참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함께가 중요하고, 함께 이룬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예수님이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나중 된자는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는 나중 되느니라”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신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훈련이 바로 이것입니다.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함께 기쁨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일까요? 바로 하나님과 함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입니다. 

4.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시는 길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영광의 그날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제자들의 발걸음 가벼웠고, 예수님의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품꾼을 부르신 포도원 주인의 말이기도 합니다. 품꾼을 고용하기 위해 직접 인력 시장으로 향했던 분이 포도원 주인입니다. 섬기는 삶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시각 장애인 두 명의 눈도 뜨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본 자들이 되었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이 소리에 제자들의 발걸음은 더 가벼워졌고, 예수님의 발걸음은 더 무거워졌습니다. 제자들은 들어야 할 포도원 주인의 부름은 듣지 못했고, 받을 품삯만 계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환호하며 높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십자가를 지실 예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성전을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그곳에서, 너무나도 기 막힌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돕는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돈을 벌겠다고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배를 채우기 바쁜 사람들로 성전은 가득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절실하게 필요했던 일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하시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 (마 21:13)’
하나님의 집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라는 당부이신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초대받은 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은 수난은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으로도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모습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공간은 주님께 기도하는 장소인가? 이 공간은 서로를 위해 격려하고 기도해 주는 장소인가? 제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왜 기도해야 할까요?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 위해서입니다. 포도원 주인과 함께 포도원에 가서 포도를 따기 위해서입니다. 워밍업이 필요합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곳이,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집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 가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산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가시다, 마음이 움직이시면,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이곳이 특별한 곳이 될 것입니다. 일 분을 기도하더라도,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그리고 형제, 자매들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기도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쩌면 포도원에서 포도를 따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우리 모두가 선택되었다고 믿습니다.  

맹인 두 명이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기도할 게 없었기 때문일까요? 기도해야 된다는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절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먼저 본 자들이었지만, 나중에서야 주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다음 주, 토요일 아침에 함께 기도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이곳이 기도하는 집이 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은 성전 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품꾼이 포도원에서 뜨거운 태양과 사막의 먼지를 견뎌야 하듯이. 함께 땀을 흘리자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 후에는 주님이 주시는 보상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했든, 늦은 오후에 일하게 되었든 같은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보상은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