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대에게 (마 15:21-28)

2023. 5. 3. 12:41마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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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와 시돈 지방에 사는 가나안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인의 딸 때문이었다. 자식은 사랑이지만, 자식은 아픔이 되기도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린, 재수 없는 아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마에 붉은 낙인을 찍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귀신 들린 딸을 보며, 재수가 없다며 침을 뱉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딸을 보면서, 살아야 했던 가련한 인생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불행한 사람이고, 막다른 골목에 내 몰린 사람이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오늘 주인공처럼 인생을 도둑 맞은 사람들, 마음에 커다랗게 난 구멍이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 인생이 한 숨이고, 그 한 숨이 천근이나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묵상하면서 발견한 가나안 여인의 용기에 대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가나안 여인이 낸 첫번째 용기는 자신의 아픔을 만 천하에 공개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 자신의 속 사정을 다 털어놨습니다. ‘가나안 여인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엄마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봤습니다. “참 힘겹고 버거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필요하지만,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많은 친척도 외면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조차 이 엄마를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 막다른 골목에 내 몰린 위기의 사람이 가나안 여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엄마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인처럼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오랜 침묵을 깨고, 오랜 금기를 깨고, 여인은 남들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던 이야기를, 큰 소리로 공개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큰 용기를 낸 가나안 여인은, 그의 바램대로 남들에게, 무엇보다 주님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았을까?”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아픔을 만 천하에 공개한 여인은, 자기의 기대처럼 즉각적인 반응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인의 고백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회피였고, 예수님도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꾸도 없는 예수님의 반응에, 여인은 혹시 자기 소리를 못 들었을까 하는 조바심에 더 큰 소리로 주님을 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주님을 목 터져라 불러 봐도,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는 주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또한 왠지 익숙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시지요?

귀신 들린 딸을 돌보느라, 상하고 지친 여인이 드리는 기도를 주님이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차갑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인이 실망할 것 같습니다. 실망할 수 있습니다. 실망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인이 낸 두 번째 용기입니다.
어떤 용기일까요? 자기가 원하는대로 금방 안 돼도, 포기하지 않는 용기입니다. 어떤 분은 한 번해서 안 되면 상처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하고 안 되면 상처받고 포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도 세 번은 해 보고, 포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인은 수도 없이 시도한 것 같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무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세상에서, 주님께 용기를 내서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지지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 내 편이 되어 주실 분은 주님 뿐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간절하고 처절한, 진심이 담긴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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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전히 가나안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주님에게 기도한 것입니다. 거절당하는 느낌이 들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마음 근육이 튼튼해서였을까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거절당하는 느낌이 들어도, 꿋꿋하게 기도하실 수 있으세요? 주님의 침묵이 오래 가면 갈수록, 가나안 여인의 목소리는 더욱더 커져 가고 있습니다.

딸이 미친 것인지, 엄마가 미친 것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여인의 외치는 소리에  지친 제자들이 간청했습니다.‘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제자들이 지금, 시끄럽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너무 간절한데, 제자들은 소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여인의 간절한 기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간절함으로 느껴지지 않고, 귀찮은 마음이 생기게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여인은 속상해서, 간절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제자들은 ‘그를 보내소서’라고 하면서 상대하기 싫어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여인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그를 오게 하소서’라고 말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한 말은, 사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이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방이 막혀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듣는 말들입니다.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아파다고 도와달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소음으로 듣는 사람들 속에서, 여인은 더욱더 외로웠을 것 같아요. 절대 고독의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 드는 생각이 이런 게 아닐까 합니다. ‘사는 게 참 거지 같다’ ‘사는 게 참 지랄 맞다’라는 자조 섞인 말이 터져 나올만합니다.그때,  드디어 예수님이 한 마디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말입니다.   ‘그럼 그렇지. ‘저런 이방인은 저주를 받아도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우상을 섬기는 민족은 그 우상에게 붙잡혀서 살아도 된다. 고생해도 싸고, 망하는 게 당연하다’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인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말씀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이라 슬픈데, 안아주시는 못할 망정 내 치는 듯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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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에는 여인이 예수님의 앞을 가로 막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무릎을 꿇고 절을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춘 것입니다. 자존심을 버린 것입니다. 인생을 도둑맞은 여인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인은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간절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간절하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간절한 만큼 자존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남아 있는 자존심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가나안 여인은 그 남은 자존심 마저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용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 용기인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사람들이 조롱하고, 주님마저도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렵게 낸 용기인데, 용기가 더 생기기는커녕 작아지게 만드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자꾸만 용기를 내서 주님께 요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가나안 여인에게 생긴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딸에 대한 사랑에서 생긴 게 아닐까 합니다. 자존심도 버리게 만드는 용기가 ‘엄마’에게 있습니다. 귀신 들린 딸이지만,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딸이지만, 남들이 외면하고 돌을 던지는 딸이지만, 그런 딸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에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더욱 기도하게 됩니다. 거절당하고 거절당해도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인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처절하게, 간절하게 주님 앞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 예수님이 한 마디를 덧 붙여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 하셨던 예수님이기에, 누구보다 힘겨운 인생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여인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니까 귀 기울여 듣게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귀를 의심케 하는 말씀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날카롭고 차가운 비수 같은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무척이나 용기를 내고 있는 가나안 여인의 심장에 칼을 꽂아 버리는 듯한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이 말은 제자들의 마음은 뻥 뚫리게 하는 사이다 같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정한 나라, 부정한 여인, 개 같은 것들의 불행은 당연하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맞습니다. 가나안은 죄가 많은 곳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만 했던 나라입니다. 우상과 욕망으로 충만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하나님이 저주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나라,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는 사치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인 것처럼 드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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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무시와 멸시와 냉정함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주여 옳소이다’ 주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그런데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나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불행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앞에서 여인이 던진 이 말이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개로 여겨도 좋고, 무시해도 좋고, 자존심이 뭉개져도 좋은데, 그래도 자기 딸만큼은 주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라는 어미의 마음이 녹아 있는 대답이기도 합니다.

용기를 내되 끝까지 용기를 낸 것입니다. 딸에 대한 사랑이, 딸을 향한 간절함이, 가나안 여인에게 용기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를 드디어, 주님이 칭찬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우리는 용기라고 부르고, 주님은 믿음이라고 부르십니다. 여인이 여러 번 용기를 낸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용기는 ‘믿음이 있어야’ 정말로 낼 수 있습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신다는 믿음일까요? 귀신에 붙들려 있는 딸을 치료해 주신다는 믿음일까요? 그런 믿음일 수도 있겠지만, 여인의 믿음은 주님만이 이 모든 것의 해결자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도,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저를 어떻게 대해 주시도 상관 없습니다. 다만 제 딸을 구원해 주실 분은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이 고백에서, 포기하지 않는 용기로, 자신을 버리는 용기로 나타난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습니다. 뒤에는 중무장한 애급 군사들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앞에도 길이 없고, 뒤에도 길이 없습니다. 대안이 없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시지요? 홍해 길이 열렸습니다. 믿음으로 한 일입니다.

사방이 막혔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광야에서 빈 손이 되었을 때, 그때가 절망의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근심하고 염려하고, 비관하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어도 이상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희망이 없고 빛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의지가 꺾일 수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쓰러질 수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게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으면 달라집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주님이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주님 밖에 대안이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자신의 약점과 근심을 고백하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께 매달리되 끝까지, 주님께 매달립니다. 다른 것은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본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가나안 여인에게는 있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떤가요?

부정한 딸을 가진 엄마 같나요? 사방이 막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나요? 절망의 시간이고, 절대 고독의 시간인가요? 기도하기는, 이 때가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워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이 고침을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간절함이 담긴 기도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용기 때문이고, 사랑 때문이고,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대안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도자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절호의 기회를 우리가 가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